당신은 1980년 5월, 광주의 사진기자입니다.
렌즈에 담긴 열흘의 기록을 따라갑니다.
카메라·동작 센서는 선택 사항이며, 거부해도 모든 미션을 버튼으로 진행할 수 있습니다.
서울의 봄, 그리고 광주
1979년 10·26으로 유신 정권이 무너지자, 겨우내 억눌렸던 민주화의 요구가 봄과 함께 피어났다. 사람들은 이를 '서울의 봄'이라 불렀다. 그러나 12·12 군사반란으로 군을 장악한 신군부는 그 봄을 오래 두고 보지 않았다.
1980년 5월 17일 밤, 당신의 책상 위 라디오가 지직거린다. 카메라 가방은 늘 그렇듯, 방 한구석에 놓여 있다.
자정의 라디오 — 취재 가방을 꾸려라
「…금일 24시를 기해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 라디오가 짧게 말하고 침묵한다. 전화선 너머 선배의 목소리가 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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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
12·12 군사반란으로 군을 장악한 신군부는 1980년 5월 17일 24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모든 정치활동이 금지되고 대학에는 휴교령이 내려졌으며, 김대중을 비롯한 정치인과 재야인사들이 연행되었다.
광주에는 공수부대가 배치되었고, 모든 신문과 방송은 계엄사령부의 사전 검열을 받아야 했다. '서울의 봄'은 그렇게 끝나고 있었다.
전남대 정문 — 셔터 찬스
휴교령이 내려졌는데도 학생들이 교문 앞에 모여 있다. 그 맞은편 — 얼룩무늬 군복. 공기가 팽팽하다. 당신의 자리는 여기, 뷰파인더 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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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쟁의 시작 — 전남대 정문
5월 18일 오전 10시경, 휴교령에도 등교한 학생들과 교문을 막은 제7공수여단이 전남대 정문에서 충돌했다. "계엄 해제하라", "휴교령 철회하라"는 외침이 열흘 항쟁의 첫 목소리였다.
곤봉에 쫓긴 학생들은 시내로 향했고, 오후에는 금남로 일대로 시위가 번졌다. 계엄군의 시내 투입이 시작되었다.
금남로 — 필름을 지켜라
골목에서 필름을 갈아 끼우는 순간, 그림자가 덮친다. "카메라 내놔!" 품속의 필름 — 오늘 광주가 세상에 남길 유일한 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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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잉 진압, 그리고 빼앗긴 렌즈
시내에 투입된 공수부대는 학생과 시민을 가리지 않고 곤봉과 착검한 소총으로 진압했다. 남녀노소가 끌려가고 쓰러졌으며, 현장을 찍던 기자들도 폭행당하고 필름을 빼앗겼다.
진압이 잔혹할수록 지켜보던 평범한 시민들이 거리로 나섰다. 공포가 아니라 분노가 번지고 있었다.
골목의 숨 — 움직이지 마라
군홧발 소리가 담장 너머를 훑는다. 서치라이트가 골목 입구를 스친다. 숨을 죽여라. 렌즈도, 어깨도, 흔들려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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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산되는 항쟁, 확인된 첫 총상
5월 19일, 전날의 참상을 목격한 시민들이 합류하며 시위대는 수천 명으로 불어났다. 계엄군은 제11공수여단을 추가 투입했다.
이날 계림동에서 장갑차가 시위대에 포위되자 계엄군이 총을 쏘아 고등학생 김영찬 군이 총상을 입었다 — 확인된 첫 총상 피해자였다. 밤이면 골목마다 수색과 연행이 이어졌다.
금남로의 불빛 — 시민을 결집하라
무등경기장에서 출발한 택시들이 전조등을 켜고 금남로로 향한다. 버스와 트럭이 그 뒤를 따른다. 경적이 도시를 깨운다 — 나오라고, 함께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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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량시위 — 20만의 금남로
5월 20일 저녁, 부상자를 실어 나르다 폭행당한 동료들을 본 운전기사들이 나섰다. 택시 200여 대가 버스·트럭과 함께 전조등을 켜고 경적을 울리며 금남로로 진입했다.
이날 금남로 일대에 모인 시민은 약 20만 명. 밤 11시경 광주역 일대에서는 계엄군의 발포로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검열 — 먹칠을 긁어내라
내일자 지면 교정쇄가 돌아왔다. 광주 기사 자리마다 검열관의 먹이 지나갔다. 동료 기자가 교정쇄를 내민다. "그 밑에 뭐가 있었는지, 자네는 알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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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을 놓은 기자들
계엄사의 사전 검열로 광주의 진실은 어느 신문에도 실리지 못했다. 5월 20일, 전남매일신문 기자들은 집단 사직서를 썼다. "우리는 보았다. 사람이 개끌리듯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그러나 신문에는 단 한 줄도 싣지 못했다. 이에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
그날 밤, 왜곡 보도에 분노한 시민들이 광주MBC 사옥으로 몰려가 건물이 불탔다.
도청 앞 — 사람을 옮겨라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흘러나온 직후 — 콩 볶는 소리가 금남로를 갈랐다. 누군가 쓰러진다. 생각할 시간은 없다. 카메라를 등에 지고, 손을 내밀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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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 발포 — 그리고 시민군
5월 21일(부처님오신날) 오후 1시경, 도청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린 직후 계엄군이 금남로의 시민들을 향해 집단 발포했다. 이날 하루에만 수십 명이 목숨을 잃었다.
시민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들어 시민군이 되었고, 계엄군은 그날 저녁 시 외곽으로 물러났다. 훗날(2017년) 전일빌딩 10층에서는 헬기 사격 방향의 탄흔 245개가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감정으로 확인되었다.
헌혈의 줄 — 맥박을 맞춰라
"피가 모자랍니다!" 가두방송이 지나가자, 병원 앞에 줄이 생긴다. 학생도, 시장 아주머니도, 소매를 걷는다. 당신도 줄의 끝에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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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지어 선 사람들 — 헌혈 행렬
병원마다 부상자가 밀려들자 시민들은 앞다투어 팔을 걷었다. "피가 모자란다"는 가두방송에 학생, 노동자, 시장 상인들이 헌혈 행렬을 이뤘다.
헌혈을 마치고 돌아가던 여고생 박금희 양이 총탄에 희생되기도 했다. 그의 이름은 지금도 5·18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나눔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양동시장 — 손을 모아 주먹밥
시장 어귀에 커다란 솥이 걸렸다. 상인들과 어머니들이 김이 오르는 밥을 퍼서 뭉친다. "기자 양반, 놀지 말고 이리 와. 손이 모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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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밥 — 나눔의 공동체
양동시장·대인시장의 상인들과 동네 어머니들은 쌀을 모아 밥을 짓고 주먹밥을 뭉쳐 시민군과 시민들에게 나눠주었다. 김밥과 음료수, 물이 골목 어귀마다 놓였고, 누구도 값을 받지 않았다.
주먹밥은 오늘날까지 5·18의 나눔 정신을 상징한다.
거리의 표식 — 흰 천을 찾아라
계엄군이 물러난 거리. 약탈도, 불길도 없다. 골목 어귀마다 흰 천이 걸렸다 — 여기 질서가 있고, 나눔이 있다는 시민들의 표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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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광주 — 절대공동체
계엄군이 물러난 5월 22일부터 27일 새벽까지, 광주는 시민 스스로 질서를 지킨 자치의 도시였다. 행정과 치안이 비었는데도 약탈·방화·사재기가 없었다.
학자들은 서로를 지키고 나누던 이 기간의 광주를 '절대공동체'라 부르기도 한다. 시민수습대책위원회가 꾸려졌고, 도청 앞 분수대에서는 22일부터 26일까지 매일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가 열려 누구나 연단에 올라 발언했다.
상무관 — 가장 무거운 셔터
도청 옆 상무관. 태극기가 덮인 관들이 줄지어 놓였고, 향 연기가 낮게 흐른다. 시민들이 말없이 줄을 서서 향을 올린다. 오늘, 가장 무거운 셔터를 눌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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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에 덮인 이름들 — 상무관
계엄군이 물러난 뒤 희생자들의 시신은 도청 옆 상무관에 안치되었다. 관마다 태극기가 덮였고, 시민들은 줄을 서서 분향하며 이름도 모르는 이웃의 죽음을 함께 울었다. 미처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관도 있었다.
같은 날의 비극도 기록되어야 한다. 5월 23일 주남마을에서는 광주를 벗어나던 미니버스가 계엄군의 총격을 받아 다수의 승객이 희생되었다.
들불야학 — 등사기를 밀어라
등불 하나 켠 방. 청년들이 철필로 긁은 원지를 등사기에 얹는다. "신문이 침묵하니, 우리가 씁니다." 잉크 냄새가 밤을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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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사회보 — 광주의 유일한 언론
언론이 침묵하자 들불야학의 청년들 — 윤상원, 박용준 등 — 이 등사기로 「투사회보」를 찍어 돌렸다. 시민이 알아야 할 소식과 행동 지침을 담아 제10호까지 발행된, 항쟁 기간 광주의 사실상 유일한 언론이었다.
투사회보의 글씨를 쓰던 박용준은 5월 27일 새벽 YWCA 건물에서 숨졌다.
죽음의 행진 — 탱크 앞으로
"탱크가 들어왔다!" 새벽 공기가 찢어진다. 수습위원 열일곱 사람이 도청을 나선다. 맨몸으로, 탱크가 멈춘 큰길을 향해 걷는다. 당신은 그 곁에서 걸으며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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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몸으로 탱크를 막다
5월 26일 새벽, 계엄군 탱크가 화정동 농성광장까지 진입했다. 김성용 신부 등 시민수습위원 17인은 "탱크는 우리를 밟고 가라"며 도청에서 계엄군 저지선까지 맨몸으로 걸어갔다 — 이른바 '죽음의 행진'.
탱크는 일단 멈췄다. 그러나 재진입이 임박했음을 그날의 광주는 알고 있었다.
도청의 밤 — 증언을 들어라
외신 기자들 앞에서 시민군 대변인이 마이크를 잡는다. 카메라 플래시가 창백하게 터진다. 회견이 끝나자 어린 얼굴들이 하나둘 집으로 돌려보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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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밤의 사람들
5월 26일 밤,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은 외신 기자회견에서 최후까지 도청에 남겠다는 뜻을 밝혔다.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입니다"라는 그의 말이 외신 기자들의 기록으로 전해진다.
그날 밤 어린 학생들과 여성들 상당수가 설득 끝에 집으로 돌려보내졌고, 남은 이들이 마지막 도청을 지켰다.
어둠 속의 목소리 — 방송을 이어라
새벽 거리를 스피커 목소리가 흘러간다. 떨리지만 또렷한 목소리. 당신은 어둠 속에서 수첩을 편다. 이 방송만은, 한 글자도 잃어버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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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4시, 도청
5월 27일 새벽,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로 시작하는 마지막 가두방송(박영순)이 어두운 시내에 울려 퍼졌다.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라는 호소를 많은 광주 시민이 이불 속에서 울며 들었다고 증언한다.
새벽 4시경 계엄군의 '상무충정작전'으로 도청이 진압되었고 윤상원, 박용준 등 많은 이들이 숨졌다. 오전 5시 21분경, 열흘의 항쟁이 멎었다.
푸른 눈의 목격자 — 필름을 숨겨라
독일에서 온 카메라 기자가 당신의 필름 몇 통을 함께 가져가겠다고 한다. "세계가 봐야 합니다." 검문소를 지나려면, 필름은 필름처럼 보여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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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로에 선 한국, 그리고 세계기록유산
독일 제1공영방송(ARD-NDR)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는 택시기사 김사복의 도움으로 광주에 들어와 참상을 촬영했고, 필름을 금색 과자 통에 숨겨 국경 밖으로 가져갔다. 다큐멘터리 「기로에 선 한국」으로 세계가 광주를 목격했다.
이후 1988년 국회 청문회, 1995년 5·18특별법 제정, 1997년 국가기념일 지정을 거쳐, 2011년 5·18민주화운동 기록물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 되었다. 당신이 지켜온 필름과 수첩 — 바로 그 기록들이다.
지워지지 않는다. 당신의 렌즈가 지킨 열흘이, 오늘의 우리를 만들었다.
피해 규모는 보상 심의 기준 수치이며, 행방불명·부상자를 포함하면 수천 명에 이릅니다. 진상 규명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마지막 한 컷 — 스물다섯 자
필름은 모두 소진되었습니다. 마지막 한 컷은 사진이 아니라, 오늘 당신이 남기는 한 문장입니다.